그러나, 쓰는 일은 그렇다


샤워를 하고 습기를 빼기 위해 선풍기를 틀어두었다. 한번 습해진 화장실은 창이 없어 습기가 잘 빠지지 않는다. 오늘은 왜인지 어떤 마음도 잘 환기되지 않는 날이었다.

머리를 말리려 헤어드라이어를 갖다 대니 슬슬 빠지기 시작한 앞머리가 티가 난다. 들추어본다. 조마조마하다. 이대로라면 십년 이내로 앞머리가 다 빠져버리고 말겠어. 그럼 나는 아빠의 어느 사십대 사진의 애처로운 가르마를 하고 있겠지. 우리 아빠를 사랑하지만 얼굴만 떠올려도 애틋하지만 그건 끔찍한 일 같아. 그런 상상을 그만두고 머리를 마저 말린다. 소란스런 선풍기 소리와 더 소란스런 드라이어 소리 사이에서 오늘 깨고 난 다음 가장 정적인 상태에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순간. 머리를 말리다 말고 괴로움이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오는 날이 잦았다. 요즘의 나는 가만히, 의무 없이 하나의 행위에 집중하고 그 다음 행위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멈추고 너무 많이 방해 받으며 너무 많은 필요를 요구 받는다.

아침에 직장으로 향할 즈음에는 늘 조금 덜 야윈 마음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고, 해서 저녁엔 편지도 쓰고 찍어둔 필름을 인화하고 여유롭게 아내와 미뤄둔 영화도 보아야 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역시나 저녁을 먹고 주방 정리를 마친 뒤 숨을 좀 돌리니 아홉시에 가까워진다. 무언가를 하기엔 이미 지쳐 있다. 마음도 얇아져 있다. 또 하나의 덜 야윈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이내 다시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남아 있는 모발 상태를 살피며 오늘 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해야 한다. 그 마음을 희생하면서 수면 시간을 지연하는 날이 있는데,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은 무언가 쓰고 싶은 날이다. 근래엔 송고하느라 느슨한 글을 도통 쓰지 못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소파에서 아내가 책을 읽고 있었고 그 모습이 예뻐, 그 정적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선풍기를 켠 채로 방에서 나는 나의 책을 읽었다. 아내가 읽던 책은 <Bird by Bird>라는 에세이 집인데, Anne Lamott가 썼다. 작가가 쓴 문장을 거의 다 좋아하지만 (그런 일도 드물다) 특히 아내가 날 불러 읽어준 문장이 한번 와닿고 나중에 또 한번 깊숙이 들어와 숨이 가빠질 것 같았다. 그런 문장을 만난 것도 기쁘고, 아내가 그 문장을 귀하게 여겼다는 것도 기쁠 뿐더러, 같은 문장으로 인해 우리가 순간이나마 동일한 마음에 머무를 수 있다는 건 꽤 감격적이다.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그러나 판매부수를 포함해 쓰는 사람으로서 기대했던 책의 향후는 한 번도 맞았던 적이 없다. 첫 두 권은 그렇다 치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책을 쓸 때도 그랬다. 출간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가늠할 수도, 도무지 ‘옳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쓰는 행위는 그렇다. 쓰는 일만이 그렇다. 쓰는 순간 충당되는 우리의 현재는 늘 그렇다. 쓰기로 했고, 쓰고 있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가늠되지 않아도 채워지려 애쓰지 않아도 또 한번 충당되고야 마는 것이다.”





주둥이는 숨통이었다가 몽둥이었다가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

모르는 사람이 죽었는데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너무 놀라 잠깐 앉아 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어제 먹다 남은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를 열었다 닫는다

밥은 먹어야 하니까

그 사람은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사실 너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네가 키우던 그래야하는데가 죽인 사람이었는데
그러면안되는데가 죽인 사람이었는데
그래서그랬을거야로 너는 또 칼질을 하고 있는데

그걸 알고 있니?

너도 아무렇지 않게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찾고 있니
찌개를 끓이고 있니

그런 네가 평생 찌개를 못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나도 널 죽이는 사람이 될까

주둥이는 몽둥이었다가 숨통이었다가 
어제 살이었다가 오늘 칼이었다가

필요할 때만 숨통인 것들이 숨 쉴 때만 열리는 날이 왔음 좋겠어 그리고 그게 다 네 탓이라고 하면
누군가 내가 휘두른 몽둥이를 가져다주겠지
날카롭게 튀어나온 톱니들이 찌개를 자른다

그런 것들로 무얼 하게?

입술이 없으면 무엇이 우릴 막을까

입을 떠나자마자 전부 부서지면 좋겠어 사람을 부러뜨리는 모든 언어가

뜨거운 걸 먹으면 입술 위로 보이는 칼자국들






서른 셋



서른 셋이다. 서른 셋이 되어 있다. 서른 셋의 나는 조금 더 차분하고 조금 더 이성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서른 셋에는 스물 다섯부터 염원하던 시인이 되어 있다. 어쩌다 몇 권의 책을 쓰게 되었다. 어쩌다라고 하기엔 나름의 최선으로 고치고 지우고 오래 썼지만. 오늘날의 나는 어쩐지 불안하다. 여태 그렇다. 등단하고 책을 내면 그게 마지막 도착점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쓰고 찍는 일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옆으로 확장되는 성격의 일인데. 주변이 늘어날수록 품이 늘수록 알게 되고 보는 게 많아서일지. 늘 부족한 것 같다.

3년간 밤낮 매달려 완성한 책은 기대보다 많은 수의 독자들에게 가 닿지 않았다. 작업 당시의 치열함은 서재에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갓 지난 사람은 쓴 후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혼자서. 책이란 게 그렇지. 여느 짓는 일이 그렇지 않을까, 하면서. 6교 7교를 봐도 아쉬움은 계속 있다. 인쇄가 다 끝난 시집도 산문집도 자꾸 고치고 싶고, 그런 나는 8년 전의 내가 생각했던 서른 셋 작가의 모습은 아니었다. 완전할 줄 알았지. 이때가 되면. 쓰는 동안 계속해서 각인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람이어서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일 테다. 나는 그 사실을 용인하게 되었다. 문장 앞에 무력했던 나는 덕분에 사람으로서 무력함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서른 셋의 나는 고작 휴대폰으로부터 벗어나려 싸운다.

작가라는 자가 타국에 지낸다는 이유로 지기들이 그립다는 이유로 온라인에서 목마름을 내거는 일이라니. 자주 부끄럽다. 그럼에도 온라인으로 만나 실제로 품을 나눠갖게 된 친구들 있어, 안부가 궁금한 이들의 요즘이 거기 있어, 나에게 구름 위의 플랫폼은 중요하게 되었다. 마음이 먼저 향하는 곳은, 그럼에도 사람이기 전에 종이이고 백지여야 할 텐데. 요즘은 통 시를 쓰지 못하다가 어제 한 편 썼다. 스무 몇의 나는 조금 더 미숙한 시를 썼지만 매일 썼었다. 내내 그렇게 할 말이 많을 줄 알고. 청탁이 오지 않아도 내리 써두는 삶이 후일의 나의 삶이라 상상하며. 
그런 시절도 있었다.

서른 셋의 나는 조금 더 분명한 표정일 줄 알았다. 한껏 들뜨거나, 맘껏 슬퍼하거나, 나의 끝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뻐할 줄 알았다. 그땐 그게 물리적인 시간과 조금의 여유와 체력이 요구되는 일인 줄 모르고.

사진가로 활동하면, 선별하고 후보정할 사진이 쌓여 있어도 두근대는 밤만 남아 있을 줄 알았다. 마감에 쫓겨도 그게 마냥 좋을 줄 알았다. 그게 일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을 줄 몰랐다. 액자에 들어갈 내 사진 앞에서, 나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큐레이터 앞에서 발 끝이 간질거리는 기쁨은 영영 같은 폭의 기쁨을 유지할 줄 알았다. 삶의 거의 모든 욕구가 그런 데서 채워지고 충족될 거라 생각했다.

충분하다는 것을 뭘까? 전시에서 돌아와 여전히 그런 순간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얼굴 모를 공허를 맞기도 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유도 모르고 헤매이는 사람의 걸음은. 그럼에도 슬프지 않았으면 한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허락된 축복을 자꾸 놓쳤다. 아무도 가로채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는데, 어디서 채워야 하는지 의구하는 마음이 오늘 밤을 밀어내고 있다. 마음은 조금씩 더 큰 다음을 갈구하고, 그런 것이 스스로의 잘못인지 반복된 질문을 통과하면서 나는 여태 스무몇의 커튼을 지나기도 한다. 저에게 그런 책임을 돌리면서. 그런 모습을 가끔 치부로 여기면서.

사람 앞에서 나는 조금 더 노련해졌나. 서른 셋엔 어떤 상황에서도 떳떳할 줄 알았다. 스스로에게도 그리 대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모든 감정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원할 때 언제든 손 내미는 삶을 살 줄 알았다.

나는 조금 더 겁을 먹었다. 노련해졌는데 조금 더 조심하게 되었다.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 조금 덜 자주 말하게 되었다. 조금 더 뭉뚱그려 조금 덜 또렷하게 조금 덜 자주 표현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애정하는 물건들에 대해. 그런 순간과, 깊이 충만해지거나 움츠러드는 슬픔에 대해 서툴러졌다. 그런 모습을 가끔 안타깝게 여기게 되었다. 자기 연민을 부끄러이 여기면서도, 그런 나를 타파하려 애쓰면서도 스스로가 슬퍼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봐 내색 않으면서. 서른 셋에는 서른 셋의 허물을 기르며 살고 있다. 물이 없는 도시에 사는 사람은 혼자만 갈 수 있는 강가를 거닐다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서른 셋인데도.

서른 셋이라서 그리하고 있다.



친구에 대하여

언제부터였는지. 친구란 개념은 형체 없고 자주 부재하는 모호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무 몇까지의 나는 친구란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고, 누구라고 늘 뚜렷한 지도를 그려놓고 살았다. 그리하고 싶어 했다. 그런 이념은 어느 순간 무너졌다.

불안해서 그랬나, 품을 잃는 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나의 안쪽으로 들이는 게. 그런 생각을 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쏟았고 어느 시절에는 사람이 나를 정의하는 단위이기도 했다. 사람이 궁금했고. 중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사람들의 유무가 중요했다.

사진을 하고 시를 쓰게 된 뒤로, 친구의 경계가 말랑해졌다. 그리고 친구의 유무는 이전 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 지나간 시절 나에게 중요했던 것을 놓친 사람처럼 가끔 느끼기도 하지만.

대낮에는 직장에서 초저녁까지 근무를 하고, 밤엔 보낼 사진을 다듬고 송고 준비를 하고 전시 준비도 해야하는 사람은 점점 몸이 짧아지고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친구는 친구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이는 더 이상 사람에 대해 예전만큼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끼는 이들에게도 그런다.

짓고 찍는 일의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수 있는 대화만이 중요해졌고 그것을 충당시키는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감당하며 살아간다. 조금 기형적인가. 여전히 풍요롭다 느낄 만큼의 품을 두었지만, 아끼는 이들이 있지만, 짓는 일을 하며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동료들이 되었다. 타국에 머무는 사람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번 실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지만, 동일한 괴로움을 말하고 기댈 수 있으니까. 마감과 이유 모를 고독과 자기연민을 포함한 혼자 지나는 모든 고충을 그들은 다 알아줄 것 같으니까. 실제로 함께 겪고 있으니까. 그렇다.

온라인으로만 알게 된 동료들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기묘한 마음이다. 만나지 않고 사람으로서 그들을 알지 못하면서 그들을 안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거. 동료애를 넘는, 불가해한 인간적인 애정이 있다. 작품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함께 쓰고 찍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늘 충분히 가까이 있다. 원하는 만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 생계 우선주위의 세계에서 두 개의 낮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관계는 중요하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는 각자가 가능할 때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공공에 자리한 개별적 만남의 공간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이들의 기분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 보고 싶은 밤이다. 거긴 아침이겠지. 나는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지만, 전하지 않으면 모를 마음이지만, 너무 자주는 않기로 한다. 친구 중 하나가 말했던 보이지 않아도 연결돼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연습하기로 한다.

살아내려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마음처럼 느껴지는 아침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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