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nwoo Hwon Lee
이훤

현재가 있는 동안 미래형인 편지


이곳을 영영 떠나면 나는 어떻게 읽힐까. 갑자기 못 돌아오게 되면. 왕왕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픔 없는 곳으로 가겠지. 몸이 끝나고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떠났을 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간절해진다. 지금. 오늘 당신의 안부를 듣고 싶어진다. 지금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오늘이 언제 끝날 지 아무도 모르니까. 사랑하는 몇을 보내며 나는 이 일이 나에게도 정말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우린 서로에게 충분히 세세해지지 못하다 떠난 후에야 일인칭으로 고백하지 않나. 그때는 다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데. 마음을 미리 듣고 싶다. 알고 싶다. 잘 모아두었다가 함께 가지고 가고 싶다. 죽음을 목격하며 든 생각이다. 5년 전 미리 써두었던 유서를 잃어 버렸는데 영화 <안녕, 헤이즐>을 보고 다시 써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건강하지만 내일은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나의 말과 맘은 변해갈 것이다. 

사는 동안 미리 써둔 이 유서(라 쓰고 마지막 편지라 부른다)를 고치며 살 거다. 언제든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현재형으로 미래의 인사를 전해둔다. 현재가 없을 때까지 이 편지는 미래형이다. 편지를 읽고 미리 전해야 할 인사가 있다면 미리 전해주셔도 좋다. 

기억할 수 있으니.

우리는 조금 일찍, 그리고 여러 번, 인사 나눌 수 있을 테니.






Dear, 


안녕. 기쁘다. 여기까지 와주어 고마워. 너는 높은 확률로 날 애정해주는 사람이거나 내가 아끼는 친구거나 만나진 못했지만 내 작은 문장과 사진을 아껴주는 사람이겠지. 아니라도 괜찮아. 고통에 대해 그리움에 대해 어쩜 내가 너무 많이 이야기 했을지도 몰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쫓겼어 자주. 시간이 모자라는 생활에. 마감에. 끊이지 않고 만들어야 하는 삶은 우릴 충만하게 하지만 구석으로 몰기도 하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마음이 자주 모자랐어. 그럼에도 가장 열렬했던 나는 전부 거기서 시작된 것 같다. 만드는 자리, 거기서.


나는 그런 데서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자리에 머물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워. 쓸 수 있고 찍을 수 있게 해준 이들. 동료들과. 독자와 뷰어들에게. 이 일을 시작하게 해준 하나님께. 들어주고 안아주어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가 언어로 만날 수 있었어.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질 수 있었어.


글과 사진이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어. 누군가를 만지고 또 그것이 다른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고. 믿고 싶었어. 한참 지난 후에 그것은 유효하지 않은 믿음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다시 믿고 싶어졌어.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믿고 있어. 애쓰고 있어. 계속 읽고 들여다보아주는 몇을 신뢰하기로 한 거야.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의 안목과 혜안을. 이상하지. 내가 나를 신뢰하는 데 타인의 어깨가 그리 중요해질 수 있다니.


너도 그랬니?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잘 알겠지. 창작자로 사는 삶은 바람을 흉내 내는 일 같아. 


어떤 날은 모두 쥐고 있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것 같고. 지난 일의 행방도 알 수 없는 것 같아. 멀리 보는 날도 즐거운 날도 있지만 대개 그때 해야하는 일 앞에 몸을 던져 두고 약속된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반응하며 따라가는 것 뿐. 하지만 나는 바람 만큼 몸도 맘도 가볍지 못해.


낮을 살고 한 번 더 낮을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숨은 대체로 밀도가 높아. 생활과 작업 둘 모두 잘 하기 위해 항상 그 다음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자신도 모르는 채로 그리 살기도 하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그 호흡이 왠지 부치기도 해. 계속 이렇게만 살까 봐. 혹 오랫동안 해온 나의 일이 갑자기 끝나 버릴까 봐. 잠시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싶다고 느낄 만큼 가끔 나는 지쳐 있어.


타국 생활을 하면서 느낀 부재감에 대해 내가 이야기했던가? 아니, 걱정은 말고. 이젠 정말 괜찮아. 부재감을 안고 사는 법을 마침내 터득한 것 같아. 


어쩌면 그리움을 감각하는 기관이 정말 모두 마비되었는지도 몰라. 무뎌졌어. 아님 시카고로 오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정말 괜찮아졌는지도. 이러다 또 절박할 만큼 보고 싶어질 지도 모르지. 지금 여긴 2021년 봄이고 올해 여름 나는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야. 새 책으로 만나. 새 사진들로. 곧 만나. 목소리와 얼굴로 만날 수 있는 자리에서. 현재가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말이야!


천국에 가면 그곳에서도 부재감을 느낄까. 아니겠지. 환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에 둘러싸이겠지.슬픔은 없는 곳이라고 들었어. 


나의 슬픔에 동참해주어 고마워. 슬픔은 타인을 조금 더 잘 알게 해주었고 나를 듣게 해주었어. 내가 아니라고 했던 나까지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곁이 돼 주고 너의 방식으로 함께 해주어 고마워. 우리가 함께하는 방식은 전부 개별적이고 특별할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게 됐지. 네 언어를 나에게 옮겨주어 고마워. 멀리서. 가까이서. 읽고 말하는 자리서. 타국어로 이야기하다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다시 타국어로 이야기하는 어느 날에 너의 슬픔을 나눠주기도 해서 고마워. 편지와 책과 다정한 안부도. 


좀 이상한 게 있는데.


마지막을 떠올려보는데 이제껏 쓴 책이나 사진을 다시 열어볼 지는 모르겠어. 이해가 잘 안 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는데 왜 다시 보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네. 그 시절 내가 만든 것들이 소중하지 않아서는 아니야. 일부 책으로 태어나는 순간 보내주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그것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왜일까.


어쩌면 두 번째 시집은 조금 용기를 내서 열어볼 지도 몰라. 


그때의 나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절실했어. 절박해지지 말자고 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절박한 사람이란 걸 그땐 몰랐지.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몰랐어 나도. 책으로 지나간 시절을 돌려받고 다시 읽기까지. 


쓰고 찍는 일 모두 즐거워서 시작했는데 언제부턴가 꼭 잘해내야만 하는 것으로 변했나 봐. 시간이 지나니 그리 되더라.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는 일은 잘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잖아. 프로페셔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였겠지. 그것을 보아주는 이들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처음 만큼 사진과 글 쓰는 일을 깨끗하게 바라볼 순 없을 거야. 아마도, 다가올 마감에 대해 나의 움직이는 정체에 대해 시장의 흐름에 대해 그간 쌓인 맥락 같은 것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늘 생각하며 보고 읽게 될 테지. 만들 때도 그래. 그런 변화가 꼭 나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냐. 그간의 나는 내가 아니었단 말도 아냐. 다급할 때조차 우린 어떤 식으로든 구현되니까. 다만 더는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모든 것에 반응하지는 않게 되었어.


경직되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며 더 경직하기도 했던 것 같아. 스스로를 잘 발휘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실패해도 괜찮다는 너그러움이기도 했겠지.


자주 괴로웠지만 특별한 친구를 많이 만났어. 모국에서. 이곳에서. 떨어져 있는 두 몸이 가질 수 있는 무수한 맘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 그것을 나눠갖는 형태에 대해서도. 다 갚지 못할 만큼. 여러 애틋하고 어여쁜 마음을 받았어. 평소 내가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거나 요즘 기분은 어떻냐고 물었다면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알고 있겠지 이미. 고마워.


그럼에도 쓸쓸해지는 순간은 타인이 늘 개입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 해결되지 않는 마음도 존재한다는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을. 아내도 친구도 동료도 그리고 스스로조차 나를 면밀히 읽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무엇도 협조하지 않는 날도 있지. 생활의 속도도. 책도. 사람과 사람 바깥의 모든 것도. 그러나 괜찮겠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삶의 반경에 대해 무력하게 기쁜 표정을 지어본다. 내일 다시 해볼 수 있겠지.


아무렴,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어. 너는 나의 마지막 편지를 거의 끝까지 읽어주고 있잖아. 작은 나에게 여러 자리에 품과 어깨가 있었다는 데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우린 자주 꽤 오래 멀리 있었지만. 읽어준 당신들께도 한 번 더 고마워. 그간 만든 것을 아껴준 건 나의 어느 시절을 떼어 가 간직하고 수납해준 거나 다름없어. 누군가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다시 돌려준 거나 다름없어. 작업은 정말로 나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었으니까. 


고마워.


마지막 편지를 쓰는데 만드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요 몇 년의 나는 일만 했나 보다. 작가로서 존재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거의 다였나 보다. 


어릴 때 일만 하며 사는 사람을 보면, 바보 같아 왜 일만 하며 사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갖곤 했는데. 게으른 시선으로 그들을 판단하기도 했는데. 만드는 자리란 프리랜서란, 그런 리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힘든 자력을 가지는 것 같아. 초대되고. 우리 스스로를 초대하기도 하며. 이따금 꽉 차게 기뻐하며. 또 그러다 주저 앉아 금방 울 사람처럼 시무룩하며. 환희와 함몰을 반복하며 말이지. 이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오늘 나는 무지 애쓰고 있어. 사는 일을 먼저 잘 하고 싶어. 그리 스스로에게 말했어. 


잘 살아야 잘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이 말의 거듭된 실패에도 관성이 붙기도 하지만.)


미래형으로 쓴 이 마지막 편지는, 오늘로부터 가장 먼 나와 내 사람들에게 오늘 베풀 수 있는 호의가 될 테야. 갑자기 떠나게 되면 한쪽의 말만 남게 되잖아. 없는 말과 남겨지는 건 너무 슬프니까. 닿지 못하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건.


자주 쓸데없고 충만하길. 바보 같이 웃기도 하며. 울기도 하며. 만드는 순간에도 만들지 않는 순간에도. 낱낱해지고 있길.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이 편지가 더는 미래형으로 읽히지 않는 날이 오면 그때쯤 다시 한 번 읽어줘. 이곳에 미리 인사를 해두고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가. 아직도 내가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내어야 하는 자리로. 너도 그곳에 있어 아직. 더는 그곳이 나에게 현재가 아닐 때까지. 여기 머물 거야. 잘 머물 거야. ‘잘’이라는 말이 더는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고마워.

안녕!

다시 인사 하자. 이 편지에서. 그리고 영혼이 만날 수 있는 곳에서 또 만나자! 



- 진우 그리고 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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